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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9월. 102명의 순례자들이 낡고 거대한 배, 메이플라워에 몸을 싣고 영국 플리머스를 출항한다. 청교도 신념을 공유한 그들은 영국 제임스 왕의 종교적 박해와 억압을 피해 아메리카로 떠난다. 66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11월 21일 그들은 돌투성이 불모의 땅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착하나 그중 절반이 사망한다. 그럼에도 유럽에서 건너온 순례자들에게 옥수수 씨앗을 나눠주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은 정작 이 땅의 원주민 인디언들이다. 순례자들은 자신들을 도와 준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옥수수와 야생칠면조로 감사의 잔치를 벌였으니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된다. 그러나 이 감사와 나눔의 이야기는 160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사에 씻을 수 없는 끔찍한 살육의 역사로 돌변하게 된다. 이들의 도착이 미국을 탄생시킨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자 이미 정착해 살고 있던 원주민들에게는 비극적 사건의 서곡이 될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인간사에는 왜곡된 역사로 채워진 무수한 신화가 존재하지 않던가. 추수감사절과 관련된 이야기도 그런 미화되고 왜곡된 역사로 윤색되어 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 발견 당시, 토착민인 인디언의 인구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400만-2,000만 명으로 추산한다. 그들은 성품이 온화하고 자연을 벗하며 살았던 이 땅의 소박한 주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메리카를 ‘신대륙’이라 부르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주장이 아닌가. 대부분 학자들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은 몽고족으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거쳐 이곳 아메리카로 건너왔다는 데에 거의 동의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은 우리 한민족과 동일한 뿌리에 잇닿아 있다. 또 하나의 잘못된 신화는 청교도 정신만이 애초부터 미국의 건국정신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영국 플리머스를 출항한 102명 가운데 청교도는 단지 35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67명은 돈을 벌기 위해 이곳으로 온 노동자, 상인, 군인 등 잡다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있다. 미국을 생각할 때, 우리는 늘 두 얼굴의 나라를 떠올린다. 그 양면성은 바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첫 순례자들의 상반된 두 그룹의 성격과 맞물려 있다. 그 두 그룹이 아메리카 땅에 가져온 것은 한편으로는 청교도 정신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이다. 건국 초기부터 이제까지 이 두 상반된 조류는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면서 미국 역사를 관통해 오고 있다.

1620년, 아메리카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배에서 내리지 않은 채 선상에서 그 역사적인 메이플라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하는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하라.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 대영제국, 프랑스, 아일랜드의 왕이 된 신앙의 옹호자 제임스 폐하의 충성된 국민인 우리는 하나님 영광, 기독교 신앙의 진흥, 우리의 왕, 그리고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버지니아의 북부 지방에서 최초의 식민지를 창설하고자 항해를 시도하였다. 여기 본 증서에 의하여 엄숙하게 상호 계약하므로 하나님과 각 개인 앞에서 계약에 의한 정치 단체를 만들어 이것으로써 공동의 질서와 안전을 촉진하고, 그 위에 상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법령의 제정과 제도 조직을 구성한다. 동등한 법률, 법령, 조례, 헌법과 행정부를 때때로 구성한다. 이 모두는 식민지의 일반적 안전을 위한 간편하고 적합한 생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대하여 당연한 복종을 바칠 것을 계약한다. 이에 우리의 이름으로 서명한다.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였던 다니엘 웹스터는 “청교도들은 구라파 대륙의 풍요로운 유산, 즉 도덕, 철학, 과학, 예술, 문화의 유산을 가지고 신대륙에 건너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성경책을 가지고 신대륙에 왔다. 성경은 청교도들의 믿음의 토대가 되고 미국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을 둘러싼 지난 어두운 역사를 안다면 위의 메이플라워 계약과 다니엘 웹스터의 주장은 지켜지지 않은 계약이요 왜곡된 주장이 아니던가. 현재 미국이 구가하고 있는 이 땅의 풍요에 도취되어 과거 인디언의 희생을 미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땅에 들어온 백인들이 일으킨 정복전쟁과 그들이 가져온 온갖 역병으로 1900년대 인디언의 수가 25만 명으로 급감했으니 그들의 한 서린 역사를 짐작할 뿐이다. 더군다나 선교사들은 인디언 추방과 학살을 방관하고 심지어 첨병 역할까지 했다 한다. 박해를 피해 이곳에 온 순례자들은 또 다른 박해자가 되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말살했으니 폭력의 악순환에 놀아난 인간의 뿌리 깊고 질긴 죄악을 목도할 뿐이다. 이제 이쯤에서 추수감사절의 신학적 의미와 실천을 생각해 보자.

추수감사절이 기독교의 참된 절기가 되기 위해서는 인디언들의 피 묻은 역사가 있었음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수확한 첫 농작물을 바친 것이 맥추절의 기원이 된 것처럼, 순례자들이 이 땅에 도착하여 거둔 첫 수확물을 자신들을 도와 준 이 땅의 원주민들과 나눈 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다. 그 감사와 나눔의 정신을 망각한 채 자유와 개척이라는 미명 하에 정복과 수탈을 일삼은 미국 건국 초기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서 다시는 이 땅에서 신앙의 자유를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압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치유와 화해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강림(降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방식을 가르친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지 않고서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와 같다. 속빈 강정처럼 사랑 없는 감사는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이웃과의 진정한 나눔과 화해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를 거두어 내는 일을 우선으로 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피 뿌림 위에 세워진 기독교의 에토스(ethos)를 저버린 채,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피 흘리게 하는 일은 이제 더는 없어야 한다. 기독교가 더 이상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에 종속되어 그 저변부터 무너지지 않도록 청교도 정신인 자유, 평등, 정의, 개척정신과 도전 정신을 회복하는 것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각오가 되어야 한다.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미답의 땅을 찾아온 순례자의 도전과 개척 정신은 종 되었던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험난한 광야를 통과한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 현대 교회가 영적 무기력에 빠진 것은 바로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 평등, 정의에 기초한 개척정신만이 이 땅에 바른 복음과 선교의 지평을 넓혀 나갈 수 있다. 나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웃은 없는지, 교회가 왜곡된 복음으로 사회를 멍들게 하고는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을 우선 돌아볼 때, 추수감사절의 그 참된 신학적 의미는 오늘에도 생생한 의미가 되살아난다.

[기사출처 : 기독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