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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영 수필가(미주장신 신대원, 에세이 에디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건조하고 건조하며 건조하고 건조하니 

모든 것이 건조하도다  (전1:2-3 패러디)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내게 기도는 건조하다. 노동은 육체요 기도는 마음 아닌가. 기도란 게 맘 편하고 몸 편해야 나올 법한 간구일 터, 지친 육체에 뭔 정신 있겠는가. 태양에 드러난 모래처럼 땡볕에 노출된 육체는 매마르기 그지없다. 내 몸이 공중으로 모두 증발하여 사라질 때가 오고야 말 텐가. 수분과 살점이 마르거나 닳지 않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내 몸 만세 하기를. 땡볕 노동으로 쩍하면 정신 나간 소리나 한다. 그러한 육신에 무슨 맑고 촉촉한 영혼이 흐르겠는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살후 3:10)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는 뭐 그렇겠지 하고 넘어간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5:17)는 예수님 말씀에 이르면 뭔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님을 느낀다. 일이 뭐길래 이처럼 각인토록 했을까 싶다. 돈만 좀 있으면 노동 없이 글만 쓰고픈 내게 참 고약한 말씀이다. 예수님까지 나서서 강조하시니 눈치 보여 일 안 할 수가 없다. 성경 읽는 것도 일인데 땀 흘리는 노동까지 해야 겨우 먹을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도 이제까지 일하신다며 일침을 놓는다. 힘들다. 

 

<거룩한 가족>. 마르크스 엥겔스가 처음 공동 집필한 책이다. 세계를 노동자 농민 부르죠아 계층으로 구분, 노동자 농민의 가족만이 거룩한 가족이라 단정하며 “노동이 기도요, 공장이 교회다”라 선언한다. 어쩜 이리도 내 속을 시원하게 훑어주는가. 이 대목에서 그나마 한숨 돌린다. 동시대에 살았다면 분명 그들에게 한 표 던졌을 일이다. 먹고사는 원천 노동이 기도라니 내 직업은 꿩 먹고 알 먹기다. 일터가 교회라면 별도로 교회 나갈 일도 없으니 일타이패 일거양득이다.

    

대천덕 신부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으나 뜻은 결코 같지 않다. 마르크스는 노동으로써 ‘기도를 대체’해야 한다는 것, 곧 노동하면 기도한 것이니 교회 나갈 시간으로 노동이나 해라 뭐 그런 말일 테고, 대천덕 신부는 노동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 곧 노동을 숭고한 마음으로 해라 그런 뜻일 테다. 혹세무민하며 노동자 계급을 착취한 인간이 뭔들 기도로 미화하지 못할까.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요 노동은 훌륭한 기도인 만큼 노동자들이 종교를 버리고 노동에 전념하도록 마르크스가 하나님께 기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베네딕토 성인은 기도 공부 노동의 삼각 균형을 강조하며 내 편을 들어준다. 삶이 풍족하려면 이 세 가지가 밑받침돼야 함에 공감한다. 나는 분명 두 가지 요소에 자신 있다. 성인은 기도하는 거룩과 노동하는 세속을 동일하게 본다. 나는 진정 그를 그리스도 다음으로 믿고 산다. 기도는 하나님의 노동이고 노동도 기도라며 정의를 내려준다. 나는 정녕 이를 가벼이 흘리지 않는다. 기도는 그냥 다소곳이 눈 감고 손 모아 하나님을 기리면 되는 쉬운 일인 줄 알다가 기도란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 머무는 참된 일임을 그에게 듣고선, “노동을 기도하듯 거룩하게 기도를 노동하듯 정성스레” 하겠다는 새로운 표어를 만든다. 내가 노동하는 만큼 하늘에 기도로 올려지는 셈이다. 노동도 좋고 세상도 모두 좋아만 보인다.

 

노동과 기도는 히브리어에서 그 어원이 유사하다. 때문에 노동과 기도를 하나로 묶어 요롷게도 써먹고 조롷게도 써먹는다. 노동을 하든 기도를 하든 뭐를 해도 매한가지다. 둘 중 하나만 부족해도 게으름을 넘어 죄가 될 테다. 그러기에 사무엘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라 하지 않는가 (삼상12:23).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창 3:19). 생명 유지에 순응하는 노동의 자세다. 노동을 하고 땀을 흘리며 가정으로 돌아오는 여정은 인간의 시간표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 생명을 불어넣은 이후 흙에서 먹고사는 인간은 노동의 댓가로 다시 흙에서 나온 양식을 먹는다. 이때 하나님의 축복이 내리고 노동의 기도가 올려진다. 흙에서 삶은 그거다. 

 

기도란 맘 편하고 몸 편하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외려 고난이 닥치고 몸이 힘들 때라야 절실한 게 기도다. 

나는 노동으로 먹고살지만 아무래도 기도는 별도로 해야 할 일이다. 마르크스 계산대로라면 노동을 반복하는 셈이지만 노동이 뭔 기도가 되겠나 싶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 만종 >은 하루치 노동을 마치고 감사드리는 기도의 자세다. 노을 지는 들녘, 흙투성이 구두, 캐다만 감자, 비스듬한 삼지창, 저 멀리 흐릿한 교회, 그 고요한 기도의 시간에는 모든 사물이 정지한다. 기도는 이토록 숭고하다. 거룩하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내 노동을 구별하시어 거룩하게 해주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하고 있는 내 일은 팔뚝에 약간의 근육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노동이다. 평범하나 하나님께서 해 아래서 수고하도록 엄선하여 내려주신, 땀 흘리지 않고는 벌어 먹고살 수 없는 귀한 일이다. 그 결과물로 내 가정이 여유롭고 발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게 좋을 테다. 하나님은 일의 종류와 거창함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을 게다. 당신께서 내려주신 그 일을 내가 믿음으로 사명으로 해내는가의 여부, 그것을 보시지 않겠는가. 노동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쁨이 충만해져 간다. 즐겁고 즐거우며 즐겁고 즐거우니 모든 것이 즐겁기만 하다.

 

땡볕에서 일하는 내 직업, 이러니 정말 좋지 아니한가.

 

● 요롷게 조롷게 – 비표준어이나 느낌을 옮기려 그대로 기재함

 

[기사출처: 크리스천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