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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복음의 중심은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신앙에 대해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부활신앙은 기독교 초기부터 현재까지 교회가 죽임의 역사에 저항하며 인간의 역사에 무한한 영적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바울의 주장처럼 크리스천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되고 맙니다(고전 15:19). 부활에 근거한 믿음의 선한 경주는 모두 허사로 끝날 것이고 고난당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간다는 것도 무의미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로 하여금 온갖 부정과 부패와 불의, 그리고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도록 하는 부활신앙은 그리스도교의 고갱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뿌리로부터 태동되던 초기 시점에서 바라볼 때, 그리스도교 안에는 신앙의 다양한 갈래들이 공존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사도회의를 거쳐 보다 정제되고 통합되기 이전, 유대교와의 경계선이 아직은 희미한 초기 그리스도교를 생각할 때, 다양한 문화적 토양과 다채로운 신학적 이해에 근거한, 단선이 아닌 복선적 혹은 혼선적 형태의 그리스도교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부활의 문제도 마찬가지 양상을 띱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로부터 서서히 분리되는 주후 1세기 무렵에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부활체의 본질에 관한 통일된 관점이 없었습니다. 이 점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묘사해 놓고 있는 신약성경의 몇몇 곳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마 28:2-6; 눅 24:39, 41-42; 행 2:31; 요 20:27; 고전 15:50).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육체의 부활로 묘사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육체적인 것으로 강조되고는 있으나 그 부활체의 본질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누가나 요한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이야기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체가 이전 몸과는 달랐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들과는 달리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체가 ‘혈과 육’의 부활체가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부활체에 관한 상이한 견해는 예수님 부활체에 대한 정확한 본질을 둘러싼 고정된 전승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주후 2세기경에 이르면 교회 내부와 외부로부터 제기된 부활에 대한 회의주의, 특히 육체를 경멸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항하여 ‘혈과 육의 부활’을 강경히 주장하는 기독교 저술가들의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몸의 부활’과 ‘육체의 부활’은 동의어이면서 상호 교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당시 반기독교적 이방인들이 종종 그리스도인 순교자들의 시신을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소각하고 그 재를 강에 흩뿌림으로써 순교자들이 소망한 육체적 부활을 수포로 돌리고 그들의 신앙을 조롱하였다는 사실에서 한층 분명해집니다. 이러한 매장지의 박탈은 ‘시신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치명적 타격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부활신앙은 ‘육체의 부활’과는 그 궤를 달리하고 있음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목적은 고린도 교회에서 제기된 여러 다양한 문제들에 답하기 위함인데 그러한 문제들 가운데 특히 부활에 관한 논쟁이 제기되었습니다. 15장에서 제기된 부활논쟁을 다룰 때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4:16)에서 바울이 언급한 “죽은 자의 부활”(resurrection of the dead)이란 표현과 관련지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바울이 가르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듣게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 바울의 적대자들은 “죽은 자의 부활”은 없음을 주장하면서(고전 15:12) 그를 반박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을 비판하는 적대자들은 그가 사용한 용어 “죽은 자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시신의 소생”과 “혈과 육의 부활”과 동일한 것으로 각각 오해했습니다. 이러한 “시신의 소생”과 같은 개념은 당시 대중적 신화나 민담에서 자주 언급되던 이야기였기에 고린도 교회의 바울 적대자들은 그가 언급한 “죽은 자의 부활”을 이러한 유의 신화나 민담 정도로 여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가르친 “죽은 자의 부활”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오해, 즉 죽은 시신이 무덤으로부터 소생한다든지 혹은 육체가 부활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주장한 부활은 단순한 “영혼의 부활”이나 “혈과 육의 부활”이 아닌 혈과 육과 같이 썩을 것이 배제된 “몸의 부활”임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체가 씨에 견주어 지는 꽃처럼 부활 이전의 몸과는 분명히 다를 것임을 주장합니다(15:36-38). 바울은 몸의 분류체계(hierarchy)를 개략적으로 진술하고서 우선 다른 종류의 몸을 언급하기 위해 ‘육체’(flesh)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람, 짐승, 새와 물고기의 살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육체가 있음을 바울은 진술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은 각 피조물이 자신의 영역에 적절한 몸을 지니는데 그 몸은 그 영역으로부터 파생된 물질로 구성됨을 주장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한결 낮은 존재들(사람, 짐승, 새, 물고기)을 언급할 때만 바울은 ‘육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하늘에 속한 몸”(heavenly body)에도 유사한 분류체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데 이때 바울은 ‘육체’라는 용어 대신에 ‘몸’이라는 용어로 대체합니다. “하늘에 속한 몸”을 이야기할 때 바울은 왜 ‘육체’ 대신 ‘몸’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사용할까요? 그 이유는 부활한 인간의 몸이 바로 이러한 ‘육체’로 구성되지 않은 “하늘에 속한 몸”임을 후에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15:42-44). 바울은 ‘몸’(body)의 개념을 가지고 “하늘에 속한 몸”과 “땅에 속한 몸”으로 구분하며(15:40), 또한 “혼적 몸”(‘소마 프쉬키콘’. 한글 개역개정성경에서는 “육의 몸”이라고 번역해 놓고 있으나 실제는 “혼적 몸”임)과 ‘소마 프뉴마티콘’, 즉 “신령한 몸” 혹은 “영의 몸”으로 구분합니다(15:44). 여기서 “육의/혼적 몸”과 “땅에 속한 몸”은 ‘육체’에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며 “신령한/영의 몸”과 “하늘에 속한 몸”은 ‘육체’와는 다른 어떤 것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바울에게 있어 부활체는 육과 같은 썩는 요소로 구성된 것이 아닌 썩지 아니하는 불멸한 요소로만 구성됩니다. 플라톤 이후 영혼과 육체의 이분법적(dualistic) 사고를 따라가는 당시 그레코-로마 문화권 사람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로 들려졌을 것이고 이러한 부활 개념은 그들에게는 낮선 개념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오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이 주장한 부활이 “육체의 부활”이 아닌 육체와 같은 요소가 배제된 “몸의 부활”임을 주장합니다(15:50).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영적 몸의 부활’입니다.

썩는 요소가 배제된 “몸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 ‘몸’은 ‘육체’와는 어떻게 다른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 본문에 따르면 ‘육체’와 ‘몸’은 사릌스(flesh)와 소마(body)로 엄연히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되기 이전, 인간의 자연적 몸은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지만 부활체는 이들 중 앞의 두 가지 것(육과 혼)은 파편과 흡사하게 벗어버리고 높은 본질의 물질인 ‘영’(pneuma)만을 보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낮은 땅의 수준에서 높은 천상의 수준으로 분류되는 물질의 분류체계를 상정해 놓았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가져올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바울은 자신이 주장한, 부활이 썩는 것이 배제된 “몸의 부활”임을 주장합니다. “땅에 속한 것”이 완전히 배제된 프뉴마(pneuma)로만 구성된 몸이 부활체, 즉 영적 몸의 부활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우리는 부활 때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즉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에 거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혹은 “처소”는 바로 부활 이후의 상태인 ‘몸’의 썩어지는 부분이 제외된 ‘몸’을 가리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장막 집”은 몸의 썩어지는 부분인 ‘육신’임에 틀림없습니다. “프쉬케로 구성된 몸”(육의 몸)과 “프뉴마로 구성된 몸(영의 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40절에서 각각 언급하고 있는 “땅에 속한 몸”과 “하늘에 속한 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에 의하면 우리의 부활은 썩는 ‘육체’를 지니고서 다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그렇다고 한다면, 힌두교나 불교의 윤회와 별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썩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영의 몸”을 덧입는 것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는 것,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을 입는 것, 이것이 바로 바울이 주장하는 “영적 몸”으로서의 부활체입니다.

“영적 몸”으로서의 부활체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감각과 인식을 넘어선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역사 속에서 분명 일어났던 부활사건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이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진술하고 있는 것(마 28; 막 16; 눅 24; 요 20-21)과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부활체에 대한 상이한 언급은 부활이 인간 인식 안에서 그 유비(analogy)를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 사건임을 반증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일으키신 사건을 3차원의 시공간에 제한된 우리가 자신의 언어로 정확하게 풀어낼 수는 없지요. 언어가 지닌 한계입니다. 다만 증인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증언된 역사 속 단회적 사건인 예수님의 부활은 그러기에 믿음 안에서만 포착되는 사건입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지만 과학이나 경험의 영역 안에서 인식되는 사건이 아닌, 믿음으로만 수납되는 사건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부활은 언제나 가능태이며 부활신앙은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신비입니다.

4월 부활의 계절에 이런 부활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이상명 목사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기고글 : 기독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