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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 정확히는 1,230년 동안을 존속한 로마 제국의 비결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은 그 비결을 개방성, 다양성, 포용성을 바탕으로 법과 제도와 매뉴얼을 구축하고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정신으로 무장한 데서 찾는다. 바로 이 노블리스 오블리제 전통이 로마 사회에서 구현된 것이 파트로네스(patrones)와 클리엔테스(clientes)로 얼기설기 촘촘하게 연결된 관계의 그물망이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늑대에 의해 길러진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에 의해 세워진다. 로물루스는 주전 753년 4월 21일 티베르 강 동쪽 일곱 언덕에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 로마를 국호로 정한다. 로물루스는 혈연, 지연 그 밖의 인연을 맺은 부족장 100명으로 원로원을 구성하고 원로원 의원을 ‘아버지’를 뜻하는 ‘파테르(pater)’라고 부른다. 파테르에서 귀족 및 귀족 가문을 뜻하는 ‘파트리키-파트로네스(patricii-patrones)’라는 말이 파생되고, 또 이 말에서 후원자를 뜻하는 ‘페이트런(patron)’이란 말도 나온다.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유명한 역사 소설 《로마인 이야기》에서 ‘페이트런(patron)’과 ‘클라이언트(client)’의 관계를 로마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힘의 원천이라 주장한다. 페이트런의 어원인 라틴어 ‘파트로네스(patrones)’는 귀족이고, 고객 또는 의뢰인을 의미하는 클라이언트의 어원인 라틴어 ‘클리엔테스(clientes)’는 그에 예속된 평민이다. 로마 사회에서 이 둘의 관계는 단순히 강자와 약자 혹은 주종 관계라기보다는 조상 적부터 상호 깊은 신뢰에 근거하여 이뤄진 내밀한 관계다.

1세기 로마 제국에는 약 2-10퍼센트 정도의 부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람들이 가난하게 생활을 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 명의 부자 파트로네스는 여러 사람들을 돌보아 준다. 이렇게 파트로네스의 도움을 받는 사람을 우리는 클리엔테스로 부른다. 파트로네스가 여러 명의 클리엔테스들을 돌보아 주는 것은 그들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충만하기 때문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파트로네스는 돈으로 호의를 베풂으로써 그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과 명예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넓게는 로마와 동맹국과의 관계뿐 아니라 좁게는 로마인 중에 유력자(귀족)와 그 주변의 후원자들 사이에서도 행해지는 전통적 인간관계다. 국가 주도의 사회보장 제도가 없던 고대에 일종의 비공식적 사회보장 제도인 셈이다. 파트로네스는 클리엔테스의 법적, 경제적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클리엔테스는 파트로네스의 명예와 권위를 드높여주는 데 힘쓴다. 이러한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망은 로마 제국의 확장과 더불어 지중해 연안의 문화로 서서히 뿌리 깊게 정착하게 된다.

신약성경에서도 이러한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가 곳곳에서 포착된다.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과부 이야기와 관련하여, 남편과 아버지가 모두 사망한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 그 여자의 파트로네스가 된다. 파트로네스인 부자들은 저녁 식사에 많은 친구들과 클리엔테스와 그 밖에 여러 사람들을 초대한다. 가버나움에 회당을 지어 준 로마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그 동네 유대인 장로들이 그의 청대로 예수님에게 찾아와 치료를 요청한 이야기도 이러한 관계망에서 이해할 수 있다(눅 7:1-10). 즉 로마 백부장과 장로들의 관계는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 제국의 도시에 세운 가정교회 주인들과 그 관계는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그들은 바울의 영적 권위 아래에 있던 제자들이다. 그 둘 사이에 사회적 권위와 영적 권위가 상충하지 않으면서 절묘하게 조화하는 생명 공간으로써 교회는 움트게 된다. 작지만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로 자랄 겨자씨처럼, 교회는 성과 계층과 인종을 넘어 로마 제국 곳곳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그래서일까 작고 약한 겨자씨의 이미지가 여성스럽듯이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도 여성명사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라는 인간관계의 그물망으로 조밀하게 연결된 거대 로마 제국 안에, 초기 기독교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긴밀한 네트워크로 교회를 세워 나간다. 바울은 장차 로마 교회가 차지할 중추적 역할과 위상을 내다보았을까? 사도 바울은 사도들의 발길이 닿기도 전에 이미 교회가 존재하는 로마로 눈길을 돌린다. 스페인 선교를 위한 교두보 마련을 위해, 바울은 일면식도 없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뵈뵈 편으로 보낸다(롬 15:23-2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려는 원대한 선교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해서 바울은 로마 교회로부터 지원과 협력을 끌어내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에 근거한 새로운 대안 사회를 로마 제국에 건설하기 위해 복음의 정신으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공동체를 도시마다 세워 나간다. 바울은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진 교회들을 직접 방문하거나 동역자들을 보내 자칫 그리스도의 몸에서 이탈하여 개체화될 수 있는 교회 사이를 끊임없이 이어 나간다.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그분이 가르치는 생명을 분여하는 복음과 그분이 추구하는 청신한 에토스(ethos)를 삶으로 터득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원자화한 개체로서가 아니라 ‘너희’로 표현된 공동체, 즉 유무상통의 마음가짐으로 연대하고 소통하는 공동체로서이다.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다.

신약성경은 이 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을 다양하게 표현해 놓고 있다. 세상의 소금(마 5:13), 세상의 빛(마 5:14), 그리스도의 종(고전 7:22),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 그리스도의 사신(고후 5:20), 그리스도의 병사(딤후 2:3),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 모두

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다채로운 표현들이다.

키위라는 새가 있다. 이 새는 뉴질랜드에서만 사는 토종새로서 그곳의 비옥한 토양 속에 서식하는 벌레를 잡아먹고 산다. 나는 법을 잊어버린 새이다 보니 새라고 부르기도 뭐하다. 날개는 퇴화하여 없어지고 긁은 다리로 무거운 몸을 지탱한다. 주로 밤에만 활동하기에 눈도 자연히 퇴화되고 만다. 단지 후각과 발의 감각만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땅을 밟아, 움직이는 벌레의 냄새나 촉감으로 먹잇감을 찾는다.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인 날개와 눈은 퇴화되고 부리와 다리만 발달된 것이다. 키위는 새의 모양은 하고 있지만 새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새다.

창공을 가르며 활공하는 다른 새들처럼 날지 못하는 키위의 형편이 정체성을 잃은 그리스도인의 신세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들은 키위처럼 흐려진 영안으로 진위를 가늠하지 못한 채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이 세상을 뒤뚱거리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 누구나 제 이름값 하고 살아야 한다. 이름값을 하려면 명실(名實)이 상부(相符)해야 한다. 이름과 실상이 부합해야 한다. 겉과 속이 다르다든지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면 더욱 그러해야 한다. 세상의 소금과 빛, 그리스도의 종, 편지, 사신, 병사와 향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예로운 별명이다. 그 이름값대로 살지 않으면 무익한 종이 되고, 제 주인을 찾아가지 못한 채 발신인에게 되돌아온 편지가 되고, 자신을 파송한 왕이나 국가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무능한 사신이 되며, 제대로 전쟁 한 번 치르지도 못하고 백기 드는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짠 맛을 잃고서 길가에 버려진 소금처럼, 어둠에 갇혀서 발하지 못하는 빛처럼 이 세상에 하찮은 것도 없다. 그러기에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결국 무참히 짓밟히고 만다(마 5:13).

바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그리스도인 각각의 정체성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정체성도 중요하다. 하늘나라 사신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했던 이들이 있었기에 비록 겨자씨처럼 미미한 초대교회라도 이미 그 안에 우주를 품을 만큼 신앙은 광폭(廣幅)하고 기개는 웅대(雄大)하다. 이렇듯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이름에 걸맞은 값어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 사신으로 온전히 살아가는 이치를 언제 몸으로 터득할지를 생각하면 아득함이 밀려온다.

이상명 목사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기고글 : 기독뉴스]